[난민] 이주배경 장학생 가정방문 2기 - 괜히 생각이 많아지기도, 참 기분좋기도 하였던 하루 > 공익법률지원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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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은 법무법인(유한) 태평양과 협력하여 난민, 이주외국인, 사회적경제, 장애인, 북한/탈북민, 여성/청소년, 복지 등 7개 영역에서 사회적 약자가 인권침해 및 차별을 받는 경우와 공익인권 단체의 운영에 있어 법률문제가 발생하는 경우에 공익소송 및 자문을 포함한 법률지원, 정책·법 제도 개선 및 연구, 입법지원 활동 등 체계적인 공익법률지원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난민 | [난민] 이주배경 장학생 가정방문 2기 - 괜히 생각이 많아지기도, 참 기분좋기도 하였던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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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재단법인 동천 작성일14-04-28 00:00 조회2,27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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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국 대사관에 갈 수가 없어서, 출생등록을 하지 못하고, 여권도 발급받지 못했습니다.”
“학교에 입학을 하려고 해도 ID카드를 요구해서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다행히 잘 이해해 주는 교장선생님을 만나서 입학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아이가 곧 중학생이 되는데, 중학교에 입학해야 할 때가 되면 또 어떡해야 할지 걱정입니다.”
“학교에서 야외활동을 갈 때 여행자보험에 가입해야 한다고, 소풍에 함께 갈 수 없게 되었다고, 미안한 목소리로 선생님이 전화가 옵니다. 아이는 물어봅니다. 엄마, 왜 나는 소풍에 못 가? 그럴 때마다 아이에게 너무 미안합니다.”
“인도적 체류허가를 받았습니다. 일을 구하려고 다니는데, 사장님은 F-2 비자만 알고 G-1-6비자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일자리를 구하는 것이 너무 어렵습니다.”
“건강보험에 가입할 수가 없습니다.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라고 있는 것이 정말 다행인 것 같아요.”



지난 4월 9일 구팀장님, 다은님과 함께 한국에서 체류하고 있는 난민, 이주민 가정을 찾았다. 동천에서는 사회적,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가정을 선정하여 자녀에게 장학금을 지급하는 장학사업을 하고 있다. 구팀장님이 담당하는 사회공헌팀에서는 장학금을 지급하는 가정에 정기적으로 방문하면서, 그 가정의 근황을 듣고, 가정이 살아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신뢰를 쌓아가고 있다. 올해에는 그중에 난민, 이주의 배경을 가진 가정에 함께 방문하여 한국에서 체류하면서 겪는 문제들을 찾고 동천의 난민팀에서 할 일들을 찾아보고자, 2월에 잔 다르크 수진과 가정방문 프로그램을 계획하였다.

2월 말에 한 차례 방문 후 참 많은 것을 느꼈다. 우선 사람을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관계를 맺는 것은 그 자체로 큰 의미가 있다는 것, 직접 목소리로 듣고 표정으로 보는 것은 어떤 텍스트를 읽는 것보다 피부에 와 닿는다는 것, 그리고 실제 난민, 이주 배경의 가정들은 체류상태에 인해 제도권 내에서 살아가는 데에 이래저래 참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는 것, 그럼에도 한국에서 자녀를 낳고 같은 공간에서 부비대며 사는 모습에 행복함이 느껴졌다는 것들이었다.

하루 동안 돌아다니면서 마주했던 그 문제의식과 기분 좋은 만남을 또 하고 싶어, 두 번째 방문을 하였다. 이번에는 2월 말부터 함께 난민팀을 꾸려가고 있는 다은 인턴님이 일정을 짜고, 선물도 사며 방문을 준비하였다.

그리고 베스트 드라이버 구팀장님과 함께 고고씽!


첫 번째 도착지 – 최근에 난민인정을 받은 A씨 가족

열 시 반쯤 도착했을 때 장학생인 아이는 이미 학교에 가고 없었고, 아빠와 엄마, 그리고 갓난아기가 집에 있었다. A씨 가정의 경우 2012년에 난민신청을 해서 최근 난민인정을 받았다. 이전에는 오랜 기간 체류자격 없는 상태로 체류하고 있어서, 사는데 어려움이 참 많았다고 한다. 그런데 최근에 난민인정을 받았다니!! 정말 아주 기쁜 마음에 다섯 번쯤 정말 다행이라고, 매우 잘되셨다고 말했던 것 같다.

남편은 지금은 비교적 안정적으로 일하고 있었다. 난민인정을 받기 전에는 일하고도 급여를 제대로 받지 못하기도 하고, 계약서와 실제 근로조건이 많이 달랐다고 한다. 오랜 막노동으로 어깨와 허리 등이 많이 아픈데 제대로 치료를 받아본 적은 없다고 한다.

A씨는 작년에 주거지를 중심지로 옮겼는데, 이곳에 지인이 살고 있어서 비싼 월세와 보증금에도 무리해서 이사를 왔다고 한다. 이전에는 시골 동네에서 살았는데 태풍으로 지붕이 날아가서 더는 살기가 힘들어졌다고 한다. 시골 동네는 인심이 좋아서 주위 이웃들이 잘 챙겨주고, 마을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자급자족하며 살 수 있었는데, 현재 주거지로 이사를 온 이후에는 물가가 비싸서 사는 데 경제적 어려움이 많다고 한다.

장학생인 A씨의 자녀는 입학 당시에 학교 선생님의 도움을 많이 받아서 어려움 없이 입학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학교에 다니면서 소풍이나 수학여행을 갈 때 보험에 가입할 수 없어서 선생님이 미안한 목소리로 같이 갈 수 없을 것 같다고 연락이 올 때면 아이가 속상해해서 미안한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이제 난민인정을 받아서 ID카드가 있기 때문에 중학교 입학할 때에는 더 어려움이 없을 것 같다면서 기뻐하셨다.


두 번째 도착지 – 논문을 쓰는 B씨

B씨는 상가 건물 같은 곳 꼭대기 층에 살고 있었다. 2008년 난민인정을 받고 대학원 박사과정을 다니고 있었다. 그는 버마의 민주화를 위하여 투쟁하다가 박해를 받고 한국에까지 오게 되었고, 한국에서도 버마의 인권과 민주화 문제를 알리기 위해 THE GLOBAL DIGEST라는 인터넷 언론 사이트를 운영하고 있었다(http://www.gbdigest.com/). 지금은 논문을 쓰고 있고, 논문 주제 역시 “Comparison Diplomat between South Korea and Burma”라 하였다.

그는 3명의 친구와 같이 생활하고 있고, 친구들이 500달러(약 50만원) 정도 되는 집세를 내주고, 또 생활비를 부담하고 있다고 한다. 자신은 인터넷 언론 사이트 운영과 논문 때문에 경제생활을 아예 하고 있지 못하고, 그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이 크다고 한다.

B씨를 보면서 한국에서 버마를 포함한 국제 인권상황을 알리고 인권운동 및 민주화 운동을 널리 확산하는 역할을 사명감 있게 이어간다면 참 좋겠다고 생각했다.

여타의 자녀를 둔 난민 가정과는 다른 모습과 다른 고민을 가지고 있었지만, 역시나 B씨를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었던 시간은 참 유익했다.


세 번째 도착지 – 인도적 체류허가를 받은 C씨

C씨 가족은 어머니 C씨와 그의 아들, 이렇게 단란하게 둘이었다. 학교에 온 지는 14년이나 되었고, 남편도 함께 한국에서 체류하면서 아들을 낳았는데, 이후 이혼을 하고 지금은 어머니 혼자서 자녀를 키우고 있었다. 어머니는 지금 G-1-6, 인도적 체류허가를 받아 살고 있는데, 사회통합프로그램을 이수하면 현재보다 안정적인 F-5 영주권 비자를 받을 수 있어, 현재 4단계를 이수하고 있다고 하였다. 우리를 만나기 직전에도 센터에서 사회통합프로그램 교육을 받고 오셨다고 했다.

C씨의 큰 고민은 안정적인 직장이 없다는 것이었다. 체류자격 외 활동허가를 받았으나, 여성이고, 난민 비자가 아닌 인도적 체류 비자여서 사업주들이 난민 비자를 가지고 오라고 하며 거절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지금은 직업은 없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벌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인도적 체류 비자의 경우 지역 건강보험에 가입할 수 없어 그것 또한 큰 고민이라고 하였다. 최근에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인도적 체류자와 그의 가족의 경우 지역 건강보험에 가입할 수 없도록 배제하는 것은 인간의 존엄 및 행복추구를 위한 건강하고 안전하게 살 권리를 침해하는 것으로 보건복지부 장관에 대해 이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라”고 권고한 바 있었는데, 아직 개선되지 않은 상황에서 C씨와 그의 가족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지정된 병원과 약국에 가면 할인을 받을 수 있으나 갈 수 있는 곳이 매우 제한적이라고 한다.

동천의 장학생인 C씨의 아들은 <안녕 오케스트라>라는 영화에 출연해 개구쟁이면서 멋있는 매력을 보여줘서 꼭 만나고 싶었는데, 우리가 방문한 그 날 지역의 달리기 선수 대표로 뽑혀서 1박으로 대회를 가 있는 때였다. 너무너무 아쉬웠다. 영화 이후에도 계속해서 비올라를 배우고 있고, 장래희망은 운동선수, 비올리스트, 변호사라고 한다. 학교생활도 정말 잘하고, 공부도 잘하고, 호기심도 많고, 과학과 역사를 매우 좋아하며 꿈도 호기심도 참 많은 아이였다. 이제 곧 중학생이 되는데, 중학교에 가면 초등학교 때보다 학비가 많이 들어서 C씨는 걱정이 된다고 하였다.

C씨는 정말 밝고 긍정적인 에너지가 철철 넘쳐 함께 이야기하는 우리를 참 힘이 나게 하는 분이었다. C씨는 특히 아들 이야기를 할 때면 눈이 반짝반짝 하였는데, 아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참 행복하게 느껴졌다.


네 번째 도착지 – 이주노동자 D씨 가족

4번째 가정을 방문했을 때에는 D씨와 동천 장학생인 첫째 딸, 그리고 다른 식구들이 모두 학교에서 집에 와 우리를 함께 반겨주었다. D씨의 남편은 이주노동자로 한국에 들어왔는데, 고용허가 기간이 만료되었는데도 본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현재는 체류자격이 없는 상태로 한국생활을 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한국에서 태어나 본국의 국적을 가지고 있다.

아버지가 일하며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아버지는 주 6일 일을 하고 있으며 어머니는 무릎이 아파 집에서 머무르며 가정을 돌보고 간간이 집에서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고 한다. 지금 체류자격이 없는 상태여서 직장에서 보험 가입을 해 주지 않고 있어서 어머니가 무릎 수술을 할 때 수술비가 매우 많이 들었다고 한다.

D씨의 가정은 식구들이 모두 함께하고 있어 화목하고 행복해 보였다. 자녀가 입학할 때에는 학교 담임 선생님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학교 다니면서 어려움은 ID 카드가 없어서 학교에서 종종 이를 요구할 때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 학교에서 요구하는 봉사시간을 채워야 하는데 ID카드가 없어서 봉사활동을 해도 시간을 인정받을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방과 후에 주민센터에서 하는 학교 외 교육을 받고 싶지만 역시나 ID카드가 없어서 교육을 받을 수 없다고 한다.

D씨의 자녀들은 우리에게 동천에서 받은 장학금으로 중고 피아노를 샀다며 피아노 연주를 들려주었다. 처음 만난 자리에서 어머니와 쑥스러워하는 아이들에게 한국에서 살면서 힘든 상황들을 물어보면서, 이것이 혹시나 불편하지는 않을까 싶어 내내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많이 들었는데, 아이들이 앞다투어 피아노 연주를 들려주는 모습에 참 고맙고 행복해졌다. 돌아오는 길에 동천 장학생인 첫째에게 고맙다는 카톡 메시지가 왔는데, 내가 더 고맙다고, 우리 계속 연락하면서 언니 동생으로 지내자고 답장을 보냈다.


마지막 도착지 – 이주노동자 E씨 그리고 그의 아이들

마지막 가정을 향해 가는데 구팀장님이 지금 가는 이 가정이 본인이 느끼기에 가장 어려움이 많은 가정이라고 하셨다. 기대 반 걱정 반 안고 마지막 E씨의 집에 도착했다. 아주 예쁜 E씨의 둘째 아이가 우리를 집 앞에서 맞이해 주었다.

E씨는 체류자격이 없는 상태이고 이에 따라 아이들도 모두 미등록 상태로 살고 있었다. 그러나 이보다 우리가 느낀 E씨의 가정의 어려움은 엄마가 없다는 것. E씨는 아내와 이혼한 상태로 딸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다행히 우리가 갔을 때에는 E씨가 집에 있었는데, 보통 이 시간에는 일하러 가고 집에 없다고 한다. E씨는 휴일 없이 거의 매일 밤까지 일하러 나간다고 하였다.

평소 아버지가 일을 가고 없을 때에는 아이들이 직접 집안일을 하고 밥을 챙겨 먹는다고 한다. 어지러운 집에서 괜히 ‘엄마의 부재’를 느껴보았다. 편견일 수도 있었다. 아버지와 아이들의 사이는 참 좋아 보였다. 딸들이 아버지에게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아버지는 일하다가 다쳐서 건강이 막 좋지는 않다고 하였다. 올해는 맹장 수술도 하였는데, 다행히 사업주의 도움으로 건강보험 가입이 되어 있어 보험처리를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빈자리를 가장 걱정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첫째를 빼고 다른 아이들을 본국의 할머니에게 보낼 계획을 하고 있었다. 아이들에게 물어보았더니 가고 싶다고 하였다. 첫째는 아버지와 같이 남고 싶다고 하였는데, 또 괜스레 걱정이 되었다. 이제 사춘기를 겪을 나이이기도 한데, 아버지가 일을 갈 때면 스스로 살림을 하면서 살아야 하는데, 동생들까지 없으면 너무 외롭지 않을까. 아버지와 한 공간에 지내면 불편한 점이 있지는 않을까.

학용품 세트를 선물했는데, 셋이 사이 좋게 나누면서 정말 즐거워하였다. 필통에 스티커를 붙이는데, 요즘 아이돌 사진으로 도배된 필통을 보면서, 옛날 언니 학창시절에도 필통에 이렇게 연예인 사진을 도배하는 것이 유행이었다고 말했다. 아이들은 춤과 노래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했다. 학교에서 방송댄스부에 가입했는데 최근에 포미닛 노래와 춤을 배웠다고 했다. 보여달라고 했는데… 보여주지 않았다(흑흑).

나오면서 동천 장학생인 첫째에게 핸드폰 번호를 남기고 왔다. 아직 연락이 없지만, 오지랖이 발동해 자꾸 맘이 쓰인다. 동생들이 본국에 돌아가면, 한동안은 본국에 가지 않는 이상 동생들을 만날 수 없을 텐데, 괜히 아버지 E씨가 밉게 느껴지기도 하고 그렇다. 구팀장님과 다은인턴님과 늦은 저녁을 먹으면서 이 가정에 필요한 것이 경제적인 부분은 아닐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많은 이주 배경을 가진 가정들이 한국에서 생활하면서 경제적 지원의 필요를 많이 느끼며 살아가는데, 경제적 지원이 아닌 다른 부분의 (우리가 괜히 느끼는 것일 수도 있는) 결핍은 우리가 어떻게 해보고자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 같아서 더 마음이 어려워졌다. 그리고 한 편으로는 참, 이곳도 사람 사는 세계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끝!


-재단법인 동천 김연주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