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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양의무자 기준이 그려낸 ‘빈곤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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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재단법인 동천1 작성일20-06-10 17:47 조회1,09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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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양의무자 기준이 그려낸 ‘빈곤의 초상’

[총평]부양의무자 기준 폐지를 위한 공모전


<재단법인 동천 정제형 변호사>

 

지난 5월 기초법바로세우기공동행동에서는 부양의무자기준 폐지를 위한 수기공모전을 개최하였습니다. 이번 수기공모전은 온라인으로만 홍보되었지만 상당한 호응을 얻어 가족, 부양의무자 기준, 빈곤, 가족 내 돌봄 등을 주제로 각자의 삶을 생동감 넘치게 그려낸 좋은 수기를 여럿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번 수기공모전에서는 공모전의 취지에 부합하면서도 진정성 있는 글들을 수상작으로 선정하였습니다. 이번 수상작들은 각자 다른 삶의 단면들을 그려냈지만, 부양의무자 기준으로 대표되는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의 엄격한 대상자 선정 기준을 마주하여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 했던 지점들, 그 고된 길을 지나며 생긴 상처들이 비슷하게 아로새겨져 있었습니다.

 

- 개인에게 빈곤의 책임을 전가하는 부양의무자 기준

 

부양의무자 기준이 빈곤을 마주하는 가족들에게 처음으로 강요하는 지점은 빈곤은 가장 먼저 가족 또는 가족이었던 이들끼리 고통을 나누고 극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 부양의무자 기준은 가난을 구제할 책임을 가족들에게 먼저 전가하는 제도입니다.

 

대상작인 이은정 님의 수기에서는 필자가 남편과 결별하고 5개월 된 갓난아이와 단둘이서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상황에 부닥쳤지만, 기초생활보장 대상자가 될 수 없었던 경험이 드러납니다. 이혼 전엔 형식적으로 남편과 이혼이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혼 이후엔 아이에 대한 부양의무가 있는 이혼한 남편의 재산이 있다는 이유로 기초생활보장수급자가 될 수 없었습니다.

 

가작인 김여진 님의 수기에서도 수진 씨는 집을 나온 뒤 연락이 전혀 닿지 않는 작은아버지가 주민등록상에 가족으로 등록되어 있어, 그 작은 아버지의 재산으로 기초생활보장의 수급 가구가 될 수 없었습니다. 또 다른 가작 조성경 님의 수기에서도 필자는 일자리를 잃고 가족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 형편에서 밀린 월세와 공과금을 해결해야 했지만, 30세 미만의 미혼 자녀는 부모와 하나의 가구를 구성하게 되어 있는 기초생활보장제도의 보장단위 규정에 막혀 담당 공무원의 차가운 거절만 마주하고 등을 돌려야 했습니다.

 

- 개인의 희생에도 벗어날 수 없는 빈곤과 궁핍

 

이처럼 엄격한 부양의무자 기준 등으로 인해 국가로부터 지원을 받지 못한 이들이 남은 가족을 위해 할 수 있는 선택은 각고의 노력과 눈물겨운 희생입니다. 공모전의 수기들에선 공통적으로 빈곤에도 어떻게든 함께 살아가기 위한 개인의 희생들이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대상작의 필자는 아이의 양육을 위해 건강이 나빠져도 야근을 하고, 야근으로 감당할 수 없는 비용에 대해서는 대출까지 해가며 부족함 없이 아이를 잘 키워보려고 노력합니다. 양육비를 주지 않는 이혼한 남편을 상대로 양육비 이행을 위한 소송을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김여진 님의 글 속 수진 씨도 하루에 15시간 이상 아르바이트를 성실하게 하면서 근근이 할머니와의 생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조성경 님 역시 병원에 있는 아버지를 돌보는 가족들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없어 조금이라도 일을 쉬면 월세와 공과금이 밀리기에 일자리를 어떻게든 알아보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러나 이들의 노력은 간신히 현상을 유지할 뿐이지 가족의 궁핍한 상황을 더 나아지게 할 수 없습니다.

 

- 결국, 빈곤을 담보로 빌려 쓰는 인생

 

빈곤은 깊은 수렁과 같아서 가족 구성원을 위한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그곳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지는 나의 빈곤을 담보삼아, 당장의 하루를 주변의 누군가로부터 빌려 쓰는 것뿐입니다.

 

이은정 님은 늘어나는 빚을 결국 감당할 수 없어 개인회생 절차를 밟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수진 씨는 할머니의 수술이라는 큰 비용이 들어가는 일 앞에서 부끄러움과 수치심을 무릅쓰고 직장의 동료에게 돈을 빌려야만 했습니다. 조성경 님 역시 남자친구와 친구들에게 부끄럽고 불편하고 미안한 마음을 안고 돈을 빌리거나 집주인에게 사정을 빌어 밀린 월세와 공과금을 조금씩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국가가 돌보지 않는 가난들은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고, 개인적 생존방식을 모색하게 만듭니다. 이번 수기들의 인물들은 아직은 일할 수 있어서, 혹은 손을 내밀 주변의 따뜻한 이들이 있어서, 여전히 위태롭지만 하루의 삶을 어떻게든 연장해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노동할 수 없거나 주변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이들이 엄격한 요건으로 수급조차 받지 못하는 경우, 이들은 삶의 의지를 상실하고, 심지어 극단적 선택을 하게 되기도 합니다. 우리가 미디어를 통해 가끔 마주하는 사회적 죽음들은 이러한 과정을 겪는 이들 중 일부에 불과합니다.

 

- 마침내 생존에 쫓겨 일상화된 이상한 빈곤 가족의 삶

이처럼 빈곤을 누군가에게 증명해야 하는 상황에서의 부끄러움과 수치심, 그것을 무릅썼음에도 요건이 안된다는 이유로 국가로부터 구제받지 못했을 때의 참담하고 억울한 심정 등은 부양의무자 기준이 빈곤 가족들의 마음에 새긴 큰 상처일 것입니다.

 

우리는 가작 속 조성경 님이 그랬듯 빈곤의 상황을 직접 마주하기 전에는 자신의 가난을 온전히 내보여야 하는 순간에 교차할 수많은 감정들, 그럼에도 자신의 가난이 구제받지 못했을 때의 참담함과 불안함 등을 결코 느껴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겪은 그 큰 상처들이 우리에게 전해지지도 않습니다. 이들에겐 기초생활보장제도를 처음 마주했을 때 느꼈던 부당함과 억울함을 해결할 시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생존을 위한 몸부림 속에서 대상작의 표현처럼, ‘흉터처럼 욱신거리지만 다시 고쳐볼 생각조차 하지 않고마음 깊이 묻은 채 그저 적응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살펴본 것처럼 부양의무자 기준을 비롯한 제도가 만들어내는 빈곤 가족의 삶은 일반적이지 않습니다. 빈곤 속에서 이들은 먼저 자신의 가난을 전부 드러내고 수급받을 자격이 있음을 증명해야 합니다. 그러나 부양의무자 기준 등 기초생활보장제도의 엄격한 요건은 정말로 살기 힘든 이들마저도 제도에 진입할 수 없도록 만듭니다. 거절당한 이들은 부당함과 억울함을 어디에 읍소할 틈도 없이 어떻게든 살아야 합니다. 이들은 자신의 힘으로 빈곤을 벗어나려 하지만, 개인의 노력으로도 어쩔 수 없는 빈곤 속에서 또다시 자신의 가난을 누군가에게 내보이면서 빚을 집니다. 마침내, 이들은 가난과 수치스러움에 익숙해지고 억울한 마음조차 잊은 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 뿌리 깊은 사적 부양의 원칙

 

이렇게 힘겹고 눈물겨운 빈곤의 경험들은 사적 부양의 원칙을 전제로 설계된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가 만들어냅니다. 현행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은 부양의무자의 부양과 다른 법령에 따른 보호는 국민기초생활보장법에 따른 급여에 우선하여 행하여지는 것으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3조 제2). 법으로 규정된 이 원칙이 부양의무자 기준과 협소한 가구 단위 지원 대상자 선정의 근거로 공고히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번 공모전의 수상작들에 드러난 사례들처럼 부양의무자 기준 때문에 기초생활보장제도에 진입하지 못하는 비수급 빈곤층은 전체 비수급 빈곤층의 67.3%에 이를 정도로 그 수가 많습니다. 이번 연재가 개인의 안타까운 경험을 나누는 것에 그치지 않고, 부양의무자 기준을 비롯한 엄격한 요건들로 인해 지원이 절실한 이들에게 필요한 지원을 하지 못하는 기초생활보장제도의 여러 문제점들을 사회적으로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나아가 이번 공모전이 빈곤을 마주하는 평범한 일상에 대한 수기라는 점에서 시사하는 점이 큽니다. 독자들이 연재된 수기들과 심사평을 읽고 하루하루를 연명하느라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는 빈곤의 초상들이 도처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고, 부양의무자 기준 폐지에 응원과 지지를 보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글은 공모전 수상작에 이어 2020. 6. 10. 비마이너에 기고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