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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 칼럼] 조례로 인종차별적 혐오표현을 규제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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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7-08-30 10:26 조회2,18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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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례로 인종차별적 혐오표현을 규제할 수 있을까

 

신체적 충격보다 정신적 충격이 더 깊은 상처를 남긴다고 한다. 똥남아, 짱깨, 개슬람, 바퀴스탄 등 특정 인종을 지칭하는 비속어류의 신조어들이 요즘 난무하고 있다. 또 이주민이 우리나라사람의 일자리를 빼앗아간다, 세금을 축낸다, 테러리스트다 등 부정적 시선에서 나온 근거 없는 말이 떠돈다. 언어의 위력은 강력하고 좋지 않은 말일수록 전파력이 빠르기 마련이다. 200만 명이 넘는 이주민이 지역주민으로 함께 살아가고 있는 오늘날, 건강한 공동체 사회를 지향하려면 다양성을 포용해야 하는 마당에 인종차별적 혐오표현을 방기하는 것은 또 다른 갑질 횡포나 다름없지 않을까?


혐오표현은 화자가 특별한 의도성 없이 한 말장난일지라도 당사자에게는 모욕감과 치욕감이 담긴 언어폭력으로 다가올 수 있다. 국가인권위원회에서 2016년에 진행한 실태조사에 따르면 혐오표현으로 인해 소수자는 두려움, 지속적 긴장감, 자살충동, 공황발작 등 심리적 해악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 일이나 학업의 중단, 사회적 배제를 경험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혐오표현으로 인한 해악은 집단 구성원에 대한 인격권을 비롯한 인간의 존엄성 훼손뿐만 아니라 집단 전체에 대한 차별과 배제로 이어져 평등권을 침해한다. 특히 집단에 대한 차별, 적의, 또는 폭력을 선동하는 혐오표현은 잠재된 위험성으로 인해 형사적 제재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그러나 현행법상 혐오표현을 규제하기에는 여러 가지 한계가 있고, 또 표현의 자유와 상충되는 측면이 있어 아직 법적 제재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도출되지 않은 상황이다.


한편 일본에서는 특히 재일코리안을 상대로 한 헤이트스피치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부각되자 오사카시에서 조례를 제정하여 대응한 바 있다. 이에 힘입어 「본국 외 출신자에 대한 부당한 차별적 언동의 해소를 위한 대책 추진에 관한 법률」, 이른바 헤이트스피치 억제법이 제정되었고, 현재 가와사키시에서도 ‘헤이트스피치를 용서하지 않는 가와사키 시민네트워크’를 중심으로 조례 제정을 추진 중이다.
 
우리나라에서 인종차별적 발언이 법원에서 처음으로 모욕죄로 인정된 보노짓 후세인 사건이 발생한 지역이 부천이다. 일본가와사키 시와 우호도시 협약을 체결한 부천시는 외국인주민이 전국에서 7번째로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다. 부천시 지역사회에서 인종차별적 혐오를 내포한 발언에 대한 대응 방안으로 재단법인 동천은 아시아인권문화연대, 부천시의회 공공성강화연구회 등과 함께 인종주의적 혐오표현을 규제하는 조례 제정을 추진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8월 18일에는 “인종차별과 혐오표현 대응 전략 마련을 위한 토론회”를 개최하여 한국의 상황 및 일본 시민사회의 노력과 지방자치단체 차원에서의 대응과정을 살펴보았다.
 
생활자치의 한 축이며, 지역사회를 움직이는 제도적 기초인 조례 제정을 통해 혐오표현에 관한 담론을 형성하고, 혐오주의에 대항하는 시민사회의 역량을 키우는데 일조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며 혐오표현에 대응할 수 있는 조례의 내용을 검토해보고자 한다.


우선 지방자치가 발달한 일본과는 달리 우리나라는 조례 제정에 한계가 있다. 지방자치법 제22조 단서에 따르면 ‘주민의 권리제한 또는 의무부과에 관한 사항’이나 ‘벌칙’을 정할 때에는 법률의 위임이 있어야하기 때문이다. 혐오표현을 규제하는 법이 마련되어 있지 않은 현재의 상황에서 법률위임을 받지 않고 있는 조례로 혐오표현 발화자에 대해서 벌칙을 부여하는 등의 침익적인 규정을 포함시킬 수는 없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지만 사실 처벌을 동반한 규제를 마련한다고 하여 반드시 차별과 혐오표현이 억제되는 것은 아니다. 많은 국가들이 혐오표현을 처벌하고 있으나 집행 실적이 미비하고,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키거나 정치적으로 남용될 우려 등 오히려 부작용도 있을 수 있다.


따라서 혐오표현 조례에는 사전예방적인 성격이 강한 형성적 규제를 담아야 한다. 예를 들면 홍보나 캠페인을 통한 인식제고, 소수자에 대한 지원, 인권교육, 사기업이나 대학에서의 자율규제, 시민단체의 반차별운동이 형성적 규제에 해당한다. 혐오표현 발화자의 권리를 제한하거나 처벌하는 것보다는 피해자를 지원하는 것을 통해 지역사회가 혐오표현 발화자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선언을 하고, 무엇보다 사전에 발생하지 않도록 교육과 캠페인을 통해 미리 예방하는 것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구체적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혐오표현으로 인한 피해 구제를 위해서는 피해 사례를 상담하거나 신고를 받고 이에 대해 조사하고, 조사 결과에 따른 후속조치를 하는 절차가 필요하다. 전문인력과 시설을 갖춘 단체를 혐오표현 피해 지원센터로 지정하여 △혐오표현 피해자를 위한 상담과 조사 △피해자에 대한 언어지원 및 소송지원 등의 업무를 위탁하고 △행위자에 대해서는 시장의 시정·개선 권고 및 조정·중재를 하도록 한다.


공공기관의 경우에는 조례로 의무를 부과할 수 있으므로 △혐오표현 관련 행동강령을 마련하고 △공공기관 직원에 대해서는 교육을 의무화 하며 △공공기관에서 계약을 하거나 위탁 업체를 선정할 때 해당 업체에서 혐오표현이 발생한 사실이 있는지 여부를 선정기준의 하나로 삼도록 한다. 이를 통해 혐오표현 발생여부를 지속적으로 감시하다보면, 민간 기관에도 파급효과가 있으리라 기대한다.


조례가 그저 상징적인 조례로 남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실행하는 부천시 당국과 시민 전체의 의지가 중요하다. 먼저 시민사회가 역동적으로 활동하여 지역사회가 혐오표현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공적 의지를 선언해야 한다. 또한 교육과 캠페인을 제도화하고 공공기관에 의무를 부과하여 조례가 실질적으로 작동할 수 있어야 한다. 타인의 고통을 감지하고 배려할 줄 아는 시민사회의 자정 노력과 자율 규제를 기대하고, 본 조례를 통해 지역사회에서 일어나는 혐오표현에 대항하는 시민들의 역량이 한층 강화되었으면 한다.

 

 


동천 권영실 변호사